원시 인류의 가구부터 고대와 중세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가구 디자인의 본질을 건축 역사와 함께 살펴본다. 나아가 현대 가구에서 과거의 유산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도 소개한다. |
가구는 언제부터 만들어졌을까? 오늘날까지 보존된 가장 오래된 가구 중 하나는 신석기 유적지 스캐러 브레이Skara Brae의 가구들이다. 스캐러 브레이는 스코틀랜드 오크니 군도의 한 섬에 있는 거주지다. 기원전 3180년부터 기원전 2500년까지 사람들이 거주했다고 한다. 보존 상태가 대단히 양호해서 거주지 안에 있는 가구들인 수납장, 선반, 침대들이 5천 년의 세월을 견뎌 그대로 놓여 있다. 특히 수납장을 보면 돌로 칸을 규칙적으로 나눈 것이 현대 수납장을 연상시킬 정도다. 이 수납장은 종교적이고 상징적인 물건을 놓아두는 신정한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집 안의 중요한 물건을 장식장에 곱게 간직하는 문화가 있는 것처럼 스캐러 브레이의 수납장은 실용적이라기보다 상징적인 기능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스캐러 브레이의 거주지
ⓒDaniel Bordeleau
스캐러 브레이의 가구들은 다행히 돌로 만들어져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하지만 돌을 다루는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에 정교하지는 못하다. 침대는 오늘날처럼 바닥 위로 들어 올린 구조가 아니라 단지 돌로 칸막이를 막은 것에 불과하다. 사진을 보면 오른쪽과 왼쪽 끝에 있는 것이 침대다. 중앙에 만들어진 사각형의 경계는 불을 피우는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스캐러 브레이의 주변에는 나무가 많지 않은 반면 돌은 널려 있어서 돌로 가구를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덕분에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스캐러 브레이 거주지에 놓인 가구들
ⓒDaniel Bordeleau
원시 인류는 재료를 가공하는 기술도 부족할 뿐만 아니라 재료도 주변에 있는 것만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스캐러 브레이의 주민들이 돌을 이용해서 집을 짓고 가구를 만든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 섬에는 나무가 거의 없다. 여기에서 초기 인류가 행한 디자인의 중요한 단서가 있다. 그것은 ‘발견’이다. 기술이 없던 시절 인류는 필요한 것을 만들지는 못해도 발견하는 재능은 있었다. 예를 들어 원시 인류의 임시 거처이자 쉼터인 동굴은 만든 것이 아니라 발견된 거주지다.
터키의 괴레메Göreme는 화산 폭발로 생긴 원추형의 기이한 바위들로 가득한 고대 도시다. 고대인들은 자연스럽게 속이 빈 원추의 내부를 집으로 이용하기도 했고, 안을 필요한 만큼 깎아내 거주 공간을 만들기도 했다. 시간이 흐른 뒤 7세기에는 거대한 수도원으로 확장되었고 예배당까지 만들었다. 괴레메 같은 도시가 만들어지기 수만 년 전 원시 인류도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활용해 보금자리로 삼았다. 만든 것이 아니라 선택한 것이다. 선택은 계획해서 만드는 단계 이전의 디자인이다. 스캐러 브레이의 가구를 만드는 데 쓴 돌을 가만히 보면 가공한 흔적이 별로 없다. 적당한 크기로 잘라낸 정도다. 가공하지 않고 주변에 널려 있는 석재를 선택해 쌓거나 세운 것이다.
자연 그대로의 바위를 이용한 터키 괴레메의 거주지 ⓒBenh LIEU SONG
바위를 깎아 만든 괴레메의 교회 ⓒDudva
스캐러 브레이의 신석기 가구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돌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석기 시대에 나무로 만들어진 가구의 운명은 혹독할 수밖에 없었다. 토기나 돌칼, 돌도끼 같은 석기시대의 유물이 많이 남아 있는 것과 달리 같은 시대의 가구 유물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가구는 대개 나무나 나무줄기와 같은 것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기술이 부족한 원시 인류가 가공하기 힘든 돌로 복잡한 가구를 만들었다고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시 인류도 가구를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 그 증거 중 하나는 지금으로부터 1만 5천 년에서 3만 년 전에 만들어진 동굴벽화들이다.
동굴벽화의 존재는 다양한 기술을 전제로 한다. 자연을 모방하는 손의 솜씨와 벽을 물들일 수 있는 물감은 기본이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깊은 동굴 속은 빛이 전혀 없다. 따라서 원시 예술가들은 동굴을 밝힐 등을 사용했음이 분명하다. 실제로 라스코 동굴에서 석등이 발견되었다. 석등은 현대로 말하면 조명기구이므로 가구의 일종이다. 또 다른 기술도 필요하다. 동굴벽화는 높은 벽에까지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렇다면 그 높이까지 사람을 받쳐줄 받침대나 사다리, 또는 그에 준하는 가구를 이용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석등은 재료의 속성상 현대까지 살아남았지만, 나무로 만든 다른 가구들은 풍화로 인해 분해되고 썩어서 사라졌다.
라스코 동굴벽화. 현대인은 기술의 혜택으로 동굴 전체를 볼 수 있지만, 그것을 그린 원시 인류는 빛의 부족으로 전체 벽을 보지 못했다.
ⓒJoJan
라스코 동굴에서 발견된 석등
ⓒSémhur
‘석기시대’라는 명칭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마치 그 시대의 인류가 오로지 석재만을 이용했을 것 같다. 하지만 거칠고 딱딱한 돌을 다룰 수 있는 인류가 그보다 훨씬 부드러운 나무나 나무줄기, 식물의 잎, 동물 가죽 등을 다루었다는 것은 자명하다. 단지 그것은 자연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현대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뿐이다. ‘석기시대’보다는 ‘자연시대’라는 말이 더 맞을 지도 모르겠다.
동굴이나 바오밥나무처럼 거대한 나무의 내부, 또한 울창한 나무의 아래나 그 위와 같은 자연은 가공하지 않은 발견된 쉼터이자 거주지다. 그처럼 가구 역시도 처음에는 만들기보다 주변에 널려 있는 자원을 선택적으로 이용했을 것이다. 원시 인류는 먹을 것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했다. 그렇게 이동하다 다리가 아프면 어딘가에 주저 앉았을 것이다. 어떤 이는 평평한 바위 위에 걸터앉았을 것이다. 그가 잠시 앉아서 피곤한 몸을 쉬웠던 그 바위는 말하자면 ‘임시변통’된 의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임시변통은 초기 인류가 행한 가장 초보적인 디자인일 가능성이 높다. 임시변통의 디자인이란 자연의 다양한 자원에서 ‘쓸모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돌칼도 그런 예다. 인류는 기술이 없을 때 죽은 동물의 가죽을 벗기고자 날카로운 모서리가 있는 돌을 주워서 이용했다. 이러한 돌이 인류 최초의 칼인 셈이다.
구석기시대 뗀석기는 돌을 돌로 떼어내서 날카로운 모서리를 만든 돌칼이다.
ⓒDidier Descouens
현대인들도 임시변통의 디자인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다. 특히 산처럼 도구가 많지 않은 곳에서 그런 사례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기다란 막대기를 주워서 지팡이로 삼다가 산을 내려온 뒤 버린다거나 평평한 바위가 마치 평상인 양 그 위에 음식을 차려놓고 먹는 것 등이 임시변통의 디자인이다. 이때 현대인들은 수만, 수십만 년 전 인류의 조상이 했던 임시변통의 선택적 디자인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등산객이 산에서 발견한 나무를 지팡이로 사용하다 산에서 내려온 뒤 버렸다.
오늘날에도 그러한 임시변통의 태도로 상품을 만들기도 한다. 1990년대에 실험적인 네덜란드의 디자인 그룹 드로흐Droog는 그런 가구들을 발표했다. 위르겐 베이Jurgen Bey가 디자인한 나무 몸통 벤치는 그야말로 자연 그대로의 통나무 위에 등받이 몇 개를 꽂은 벤치다. 아마도 어떤 원시 인류가 수만 년 전 그런 통나무에서 의자의 가능성을 발견했던 그 태도와 정신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나무 몸통 벤치는 나무를 정교하게 가공하지 않으므로 모든 제품이 조금씩 다 다르다. 디자인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주변에 널려 있는 자원에서 쓸모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듯하다.
<나무 몸통 벤치>, 디자인: 위르겐 베이, 1991년
ⓒGouwenaar
건축과 가구의 기원은 이미 세계에 존재하는 가공되지 않은 자연물들이다. 그 천연의 자연물에서 유용성을 발견하는 것이 디자인의 미약한 출발이었다. 그 단계를 지나면 모방을 하기 시작한다. 모방을 통해 기술을 연마하면 진정한 창조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글 |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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